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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에 잠시 한국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사온 책 중 한 권이다. 과학철학 입문서를 표방하는 책인데, 내용 자체도 지나치게 어렵지 않고 깔끔한 편이다. 저자의 블랙 유머가 중간중간 가미되는 편인데, 너무 대충 읽으면 본뜻을 정 반대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으니(...) 읽으면서 그 점에만 유의하면 될 것이다. 다음 내용은 책 본문 중 '지적 설계론'에 관한 언급을 한 내용이 있어 공유하고자 옮겨 보았다. 요약하자면, 역시나 지적설계론은 증거 없이 추론만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게으른 논증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진화 생물학 교과서에는 자세한 수학적 원리가 바탕이 된 방대한 체계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다양한 진화 원인의 영향 아래서 개체군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유전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과 종 내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 및 환경과 상호교류하는 방식에 대한 풍부한 실험적 자료가 이 체계를 보완 설명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종 분화", 즉 신생 종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과 함께 종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한다. 이런 책에서는 자연선택이 야생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다른 진화 과정이 지닌 상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논쟁들도 접할 수 있는데 이는 꼼꼼한 실험에 근거한 것이다.


윌리엄 뎀스키와 마이클 비히가 지지하는 지적설계이론은 과학 이론을 자처하는데, 이 이론은 최소한 몇 가지 경우에 생물체가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지적 설계 관점에서 설명한다. 예를 들어 마이클 비히는 편모(요동 모터처럼 생물체에 붙어 빙글빙글 도는 채찍 모양의 가는 실로, 어떤 종류의 박테리아는 이 편모로 인해 액체 배지에서 잘 돌아다닌다)가 자연선택 때문에 출현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것이 지성을 가진 존재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것이 비히의 주장이다. 지적설계론자들은 편모 같은 데서 드러나는 유기체의 적응이 특히 기독교의 신과 같은 특정 신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말을 피해 왔다. 이들은 보통 이 지적인 존재의 본성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는 대신 우주를 돌보는 어떤 지적인 존재가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적설계이론은 어떻게 자연선택론을 반박하는가? "다윈의 블랙박스"라는 자신의 책에서 비히는 박테리아 편모가 많은 다른 특징과 더불어 그가 말하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편모의 일부가 제거되거나 변형되면 편모의 운동 자체에 부분 장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박테리아의 생존과 번식에 무용한 신체 기관이 된다. 편모의 전반적인 운동이 너무나 정교하게 짜여 있으므로 일부분이라도 장애가 생기면 제대로 된 생물학적 기능을 하는데 엄청난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비히에 의하면, 자연선택론자들은 처음에 단순했던 특징들이 자연선택 과정을 거쳐 복잡한 특징으로 바뀐다고 여긴다. 그런데 일부가 제거되거나 변형되었을 때 전반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생물 기관이 존재한다면,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기관을 실제로 발견하게 된다면, 그런 기관이 점진적인 발전 때문에 생긴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비히의 주장이다. 즉, 비히는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기관의 존재가 자연선택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리게 된다.


비히에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은 편모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일부만 남은 편모가 회전 운동은 하지 않지만, 단백질 독소를 다른 세포에 전달해준다는 면에서 여전히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와 편모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자연 선택론과 양립할 수 없다는 비히의 입장은 틀렸다. 그는 오랜 시간 점진적인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등장한 생물체의 기관이 처음에는 엉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기관의 경우 일부가 제거되거나 변형되는 일이 자주 있어도 전반적인 기능에는 거의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자연선택을 통해 전반적인 효율성을 위해 불필요하거나 중복되는 부분들이 점진적으로 제거되어 나가다가 더 제거되거나 변형될 경우 기능 자체가 안되는 시점에 이르면 마침내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기관이 나타나는데, 이때 점진적인 과정을 통한 이 기관의 출현을 자연선택 이론은 충분히 설명해낼 수 있다. 물론, 비히 입장에서는 편모가 실제로 이렇게 출현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비판을 할 수 있다. 단순한 시작에서 점진적으로 세련되어진다는 가정이 전적으로 추측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의 지적설계이론이 편모의 존재를 자연선택론이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런 무리한 반대 주장은 사실 허구 상황을 통해 대략 설명하는 것으로 아주 쉽게 반박이 된다.


좀 양보해서 자연선택으로 설명되지 않는 생물학적 기관이 있다는 비히의 주장이 바르다고 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비히는 그것을 규명해내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지적설계이론이 편모의 존재를 설명해 준다는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적 설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편모의 특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만큼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명확하게 하기는 힘들다. 내가 독자 여러분에게 "화성에 지능적인 설계자들이 산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이 경우 내가 독자 여러분에게 이 설계자들이 얼마나 지능이 뛰어난지, 몸집은 얼마나 큰지, 얼마나 게으른 존재인지, 얼마나 협조적인 존재인지, 어떤 경제적 급선무를 지녔는지, 또 어떤 자원을 이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주기 전까지는 이 존재가 어떤 것을 설계할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지적설계이론이 박테리아의 편모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할 수 있으려면 그 지적 설계자가 지녀야 할 기구와 능력, 설계의 개요, 계획을 시행하고 개선하는 방식, 그리고 쓸 수 있는 자재물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유기체가 어떤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지 진화론자들이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지적설계론자들은 그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생물학자들은 진화 과정에 대해 추정만 하고 일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유전 변형률과 자연선택론의 강점 등에 대한 여러 가지 가정을 세운 뒤 추정한 내용을 직접 실험해본다. 이와 달리 지적설계론자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설계자가 어떤 존재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가정을 실험대에 올리지도 않는다. 바로 이런 차이로 인해 유기체 세계의 변화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 강력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반면, 지적설계이론은 그 빈약한 증거 자료로 인해 헛웃음을 자아낼 뿐이다.


어떤 면에서 지적설계이론은 진화 생물학에 상반되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지적설계론자와 진화생물학자는 편모와 같은 기관이 형성된 과정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하지만 지적설계이론이 "위협적인" 경쟁이론이 되려면, 다시 말해 강력한 증거 자료를 갖춘 이론이 되려면, 진화 생물학처럼 종분화와 생물체의 적응에 대해 철저한 실험에서 나온 자료가 바탕이 된 강력한 이론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적설계론자들이 과학자라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설계 과정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교과서를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 설계 과정이 외부 요인에 의해 위협받고도 또 언제 외부 요인을 극복하는가?"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지능적인 설계자의 본성은 무엇이며 그 설계자는 어떤 방식으로 설계하는가?" "상충하는 설계명세서를 접했을 때 설계자는 보통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설계론자들이 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우리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는다. 대신에 설계론자들은 우리 손에 생물체 세계의 목록, 그것도 엄청나게 긴 목록을 쥐어주면서, 생물체 체계가 자연선택론으로 설명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말만 할 뿐이다. 이런 태도를 지닌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 팀 르윈스,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2장: 그런 것도 과학인가 中 '증거와 지적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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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www.casinapioiv.va/content/dam/accademia/pdf/sv121/sv121-berti.pdf)


이탈리아의 아리스토텔레스 전문 철학자 Enrico Berti 가 기고한 바티칸 과학 아카데미의 논문이다. 대체로 '영-육 이원론'의 문제와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노 철학자의 고찰이 돋보인다. 그런데 내가 철학이나 신학 전공이 아니기에 원문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1) 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용하여, 영-육 이원론의 문제점, 즉 육신이 죽었을 경우 그 혼은 더 이상 그 사람 자신이 아니며 생각/사색의 주체가 그 "개인" 자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Thomas Aquinas, who was Aristotelian, was very much aware of this when he said that the soul, after the death of the body, is no longer a person (S. Th. 1, 29, 1 ad 5m; Pot. 9, 2, ad 14m, C.G. 4, 79), and when he stated, against the Averroists, that the subject of thought is the “individual man” (hic homo)."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초기부터 영혼과 육신 모두의 부활, 즉 그 사람의 전체로서의 온전한 부활을 믿어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The Christian faith, in its original formulation, suggests a belief in the resurrection of the whole person, body and soul, even before its belief in immortality understood as the survival of the soul separate from the body. Indeed, the Apostles’ Creed recites, “I believe in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and 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states, “I believe in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he Church herself, in the prayer for the dead, says, “Eternal rest grant unto them O Lord”, thus comparing the condition after death to sleep. The very canon of the Mass exhorts us to pray “for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in the hope of resurrection”. But this is obviously a matter of faith, not philosophy or science."


(2) 스콜라 철학에서 '자유의지'는 그것이 증명될 경우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필연'이 되기 때문에 증명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한다. 즉 어떤 증명이나 과정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것을 지각하게 되는 '경험'의 문제라는 것이다.


"The manuals of scholastic philosophy (see for example Sofia Vanni Rovighi, Elementi di filosofia, Milan, 1953, vol. IV) taught that freedom cannot be proved, because if it were provable, it would no longer be freedom, but necessity. Freedom is a matter of experience, such as the fact of experiencing pleasure or pain. We feel we are free, we have experienced the power to carry out or not carry out a certain action or to choose among different actions."


(3) 결론 단락의 일부인데, 한 방에 "앨빈 플란팅가" 류의 "자연주의적 진화론 비판" 논증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참고로 플란팅가의 논증은 "의식이나 지성이 단지 진화의 산물이라면 이또한 불완전할텐데 어찌 이를 옳다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Berti 는 명제의 근원과 그 명제의 사실관계 및 가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어떠한 의식이나 인간의 지적 활동이 소위 "진화적 산물"이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해서, 그 결과로 나온 연역적 명제의 신빙성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발생학적 오류"라는 얘기인듯 하다.


"The fact that the moral sense is the product of evolution, especially the evolution of social life, as claimed by Patricia Smith Churchland (Braintrust:What Neurosciences Tell Us About Morality, Princeton, 2009), based on the study of what happens in the primate brain, does not mean that moral judgements have no value (for example, a judgement such as “torturing a child is a cruel action”, according to Putnam, is a valid judgement, whatever its origin). Even Euclidean geometry, or Gödel’s mathematics, are products of evolution, like all human activities, but that does not mean that the Pythagorean theorem or 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 are not valid. We must not confuse the origin of a proposition with its truth-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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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영혼"에 관한 유물론적 접근에는 다음 책들이 있는데, 나중에 여건이 되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


Francis Crick, "The Astonishing Hypothesis - The Scientific Search for the Soul" (1994).

Gerald Edelman, "Neural Darwinism - The Theory of Neuronal Group Selection"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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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개신교의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연옥"인데, (아울러 근본주의 개독이 천주교를 이단이라 할때 "마리아 숭배"라는 성모신심과 함께 자주 드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또는 종교분열) 이후 개신교에서는 "sola scriptula"에 위배된다 하여 연옥교리를 퇴출시킨 반면 성경의 상위개념인 "성전(성경+전승)"을 유지하던 가톨릭은 연옥교리를 유지한다.


연옥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구절은 구약의 마카베오서 뿐인데, 마카베오서는 70인역 그리스어 성경만 존재하고 개신교에서는 히브리어 원본이 없다 하여 정경 목록에서 제외시킨 부분이다. (마카베오서는 신약처럼 그리스어본이 원본이라는 설도 있는듯 하다)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개인적 "감상"으로는 가톨릭의 연옥은 유대교의 "한시적 게헨나"가 발전된 개념이라 생각된다.


복음서에 '게헨나'가 사용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마태오복음 5:22, 29, 30

마태오복음 10:28

마태오복음 18:9

마태오복음 23:15, 33

마르코복음 9:43, 45, 47

루카복음 12:5


게헨나의 어원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Ge (ben) Hinnom)이며 예루살렘 남서쪽의 소위 "쓰레기 소각장" 이다. 그 이전에는 예루살렘인들이 몰록신에게 어린 아기를 산 채로 불에 태워서 공양하던 곳이니, 말 그대로 생지옥이며 불지옥인 셈이다.


The Jewish Encyclopedia 에 따르면 유대교에서의 "게헨나"는 지옥+연옥 정도의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말하자면 성인군자들은 바로 천국으로 가고, 악인들은 게헨나에서 영원히 소각되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은 게헨나에서 최대 12개월 동안 소각되어 속죄와 정화를 마친 뒤에 천국으로 향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의 "한시적 게헨나"가 "영원한 게헨나"에서 분리되어 가톨릭의 연옥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개념의 게헨나는 루카16:19-31 의 "부자와 나사로" 부분을 보시면 잘 나와 있다. 나사로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고 하는데, 거기서 단절되어 영원한 형벌을 받는 부자와 아브라함이 대화를 한다. 잘 보시면 나사로는 "하느님의 품"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 그곳은 지옥은 아니며 천국도 아니다. 말하자면 "셰올"이라는 유대교 특유의 저승세계인데, 거기서 불타는 형벌을 받는 곳은 "게헨나" 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옥의 부자가 나사로를 품에 안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네? 지옥은 이승 및 천국과 모두 단절된 곳이라던데...


그런데 이곳이 유대교의 "게헨나" 라고 한다면 모든 아구가 맞아 떨어진다. 부자는 "영원한 게헨나" 형벌을 받게 되었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천국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일시적 게헨나"에 머문다. 바로 이것이 "일시적 게헨나"가 "연옥"의 개념과 일치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어째서 아브라함이 여태 천국 안가고 거기 있었나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일단 여기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일단 '유대백과사전'에서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게헨나의 입구를 지키며 할례받은 이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다고 한다.


사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원론적 개념은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유대교에 없던 개념이긴 하다. 천국과 지옥, 선신(야훼)과 악신(사탄) 등의 구분은 역시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참조: 유대교 대사전

http://www.jewishencyclopedia.com/articles/12446-purgatory

http://www.jewishencyclopedia.com/articles/6558-geh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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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삼위일체를 믿는가?

A: 그건 예수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다. 소위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요즘으로 치면 ‘갓예수’ 또는 ‘예수갑’ 아니면 ‘킹왕짱 예수’ 정도 되는 뜻일거다. 굳이 종교적 의미를 붙인다면, 당시 로마 황제가 불리기를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 불리었다.


Q: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기적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가?

A: 복음서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로 들어 보자. 예수를 보기 위해 꽤 많은 군중이 모이긴 모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그 지역의 인구 수로 보아 장정만 5천명, 부녀자와 연소자 모두 합쳐 대략 1-2만명의 인구가 일시에 집결해서 며칠을 따라다녔는데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에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은 그 군중 숫자의 ‘역사적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다만, 그보다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즉, 일용할 양식을 내려준 신에 대한 감사, 한 소년이 보여준 남들을 위해 내 것을 전부 내어줌, 그리고 그렇게 받은 것을 자기들끼리만 먹는 것이 아닌 모두와 함께 공유함. 이것을 통해 다른 오천여 명의 군중들이 모두 뒤따라 자신들의 것을 내어 나누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기적’이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모두를 ‘회심’시켜 인생관 및 그에 따른 행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Q: 예수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는가?

A: 그 ‘구원’이라는 것은, 어떠한 추상적 의미로서의 ‘죄악’ 또는 특정 조상이 저질렀다는 유전적 연좌제로서의 ‘죄’에 대한 ‘대속’이라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죄’라는 개념 그 자체의 무의미함을 깨우쳐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어떠한 종교적 ‘율법’의 기준에 의한 ‘죄’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예수의 행적 중 역사적으로 있었음직한 사건들은, 알고 보면 몇 개 없다. 1세기경 유대 지역을 돌며 가르침을 전하였고,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또는 소요사태, 또는 폭동)에 관여했으며, 이로 인해 로마 제국에 의해 사형을 당하였고, 그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고서 재림을 선포하였다는 것 정도 뿐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고, 어떠한 주제 전달을 위해 각색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건들의 ‘문자적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그러한 '기적 이야기'가 어떠한 주제 의식을 갖고서 어떠한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권의 경험의 종류나 신경 조직은 거의 다를 바 없으나 그들 구성원이 동일한 사건을 묘사하고 총괄하는 데 서로 다른 개념을 사용한다 (...) 여러 다른 문화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 다른 무리의 인간들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과 그들 자신의 본질을 개념화하기 때문이다."


- F.S.C.노드롭, 《사람, 자연 그리고 신》



"나는 과연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다양한 역사적 존재들로부터 구성된 허구적인 모델로 간주합니다. 그들 중 한명은 실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무엇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야기는 성서 이외의 기록에서 전해지는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인공적인 구조물이기 때문입니다."


- 로버트 프라이스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우리가 생각하기에 '신화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 신화가 사실이 아닌 것을 넣었다기보다 신화는 그들의 사유방식이에요. 이 세상의 것을 하나님의 것, 저 세상의 세계가 관여해서 일어난 일이다라고 표현하는게 고대인들의 사유방식이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한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그게 어떻게 동정녀 탄생이 가능하냐, 또 부활도 현대인들이 믿기에 어려운 측면이었지만 고대인들에게는 신과 인간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것이 그들의 사유방식이거든요. 그 다음에 부활은 곧 고대인들에게는 인간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이, 유대인으로서 십자가에 처형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점이 (믿기) 어려운 것이지, 부활은 종종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의 아들은 일반적으로 부활한다고 믿었고..."


- 김덕기 대전신학교 신약학 교수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해설) 유대 사회를 개혁하고 지상에 신의 왕국을 세우자 외쳤던 예수의 이야기를 이교도들에게까지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신화나 우화적 요소를 넣어 복음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예수가 존재했다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있습니다. 1세기 말에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 말고도 2세기 초의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동의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에서 사회운동을 벌인 사람이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처형당했지만 그 처형은 효력이 없었고 그 운동은 모든 곳으로 번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동정녀가 잉태를 한 것이죠. 사람들이 2천년 전에 그것을 말했을 때 과연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몽이 되지 않은 그 세상에서는 이교도들이나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나 인간을 위해 아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두 남녀 간의 통상적인 방식으로 수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었다고 한 겁니다. 이건 실수도, 거짓말도 아니며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 아이가, 이교도들이나 유대인들에게서 태어난 그 어떤 아이들보다도 훨씬 특별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 혹은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세기에 예수가 존재하기 전 지중해 연안 세상에는 신, 신의 아들, 신이 보낸 신, 주님, 구세주, 계시자, 세상의 구원자로 불리던 인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였지요. 예수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명칭을 로마 황제로부터 따와서 유대인 농부(예수)에게 붙인 겁니다.


이게 바로 1세기의 언어입니다. 우리에게는 특수한 기독교인들의 언어일지도 모르지만, 모든 동전에 '황제는 신의 아들이다'라고 쓰여 있을 정도였습니다.


성경을 믿으세요. 신성한 문학으로 절대적으로 진지하게 말입니다. (다만) 비유로 의도하고 쓴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진 마세요. 우화적으로 쓴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리고 그게 역사적인 사실인지 우화인지를 놓고 문자 그대로 사실인지 혹은 비유적인 것인지를 놓고 논쟁하지 마세요. 그것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게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도전할 과제, 즉 신의 세상을 차지한 폭력배들로부터 이 세상을 되찾으라는 것. 세상을 위협하는 폭력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해내라는 것. 바로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신을 위해 이 세상을 되찾으라는 것. 왜냐하면 이 세상은 신에게 속한 것이니까요."


- 존 도미닉 크로산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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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에게 ‘진화론’과 ‘창조론’은 양자택일의 대상이다. 마주보며 달리는 끝없는 철로다. 그래서 ‘접점’이 보이질 않는다.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 진화론의 고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다. 이를 계기로 본지는 기획대담 ‘창조론 대 진화론’을 마련했다. 물리학계의 거두 장회익(71) 서울대 명예교수와 가톨릭의 스타 논객인 차동엽(51) 신부를 초청했다. 장 교수는 한때 크리스천이었고, 차 신부는 한때 공학도였다. 이들에게 물었다. 2009년의 종교(창조론)와 과학(진화론)은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나. 지난달 22일 서울 명동의 가톨릭회관에서 진행한 대담에선 파격과 관통, 그리고 고개 끄덕임의 숨결이 수시로 오갔다. 우리가 알던 ‘상식’은 곳곳에서 깨졌다.


◆신이 인간을 빚었나

- 성경은 창세기 1장 27절에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God created man in his image)’고 했다. 반면 진화론자들은 빅뱅 이후 지구 생물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나왔다고 본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출발역부터 갈린다. 과연 성경 속 창세기 편을 양쪽은 어떻게 볼까.


▶장 교수=우주 안에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은 놀라운 신비다. 그런데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이 ‘신비’를 파악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 중요한 단서가 진화론에서 나온다. 그럼 성경을 기술할 당시는 어땠을까.


▶차 신부=그들은 어떻게 봤나.


▶장 교수=피카소의 그림을 보라. 사람 얼굴을 실제와 달리 찌그러뜨렸다. 왜 그런가. 피카소는 사실을 그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적 직관을 그린 거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종교적 직관을 기록한 거다. 그게 창세기의 내용이다. 그런데 피카소의 그림을 실제 얼굴의 사진이라 해석하고, 거기서 얼굴 모습만 찾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작품성을 놓치게 된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표면적인 문자만 붙들면 성경에 담긴 진수를 놓치게 된다. 결국 본질은 놓치고 껍질만 붙드는 셈이다.


▶차 신부=그건 정확한 이해다. 성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기록됐는지를 알면 쉬워진다. 성경은 창세기가 아니라 출애굽기(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는 편)부터 씌어졌다. 해방 사건이 먼저 있었고, 이 엄청난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을 깨닫게 된 거다. ‘그 누군가가 누구냐?’ ‘그가 하늘과 땅을 지어낸 분이다’란 인식과 함께 성경을 기술한 것이다.



◆신의 창조-어떤 방식인가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장 교수의 ‘피카소 이야기’에 공감하는가를 물었다.


▶차 신부=공감한다. 우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3차원에 살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3차원 너머에 계신 초월적인 존재다. 그러니 하느님의 창조는 3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4차원이나 5차원, 아니면 6차원 너머에서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장 교수=차 신부의 얘기를 들으니 가톨릭을 다시 보게 된다.



◆과학과 종교-친구인가, 적인가


▶차 신부=가톨릭은 중세 때 과학을 박해했다. 과학자들은 당시의 절대믿음이었던 천동설(天動說)에 반하는 지동설(地動說)을 들고 나왔다. 가톨릭은 이들을 이단으로 몰았다. 나중에 지동설이 맞다고 밝혀지자 가톨릭은 엄청난 쇼크를 먹었다. 과학의 결론을 섣불리 예단하면 큰 망신을 당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게 2000년 역사를 가진 가톨릭의 몸속에 ‘소중한 체험’으로 박혀 있다. 그걸 통해 과학을 존중하는 눈이 열린 거다.


▶장 교수=상대적으로 개신교는 개교회 중심적이고, 덩치가 작다. 그러다 보니 그런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진 못하더라. 가톨릭이 지동설을 받아들인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차 신부=지동설을 수용하면서 우리(가톨릭)의 우주는 더 넓어졌다. 하느님의 초월성을 설명하기도 더 쉬워졌다. 천동설을 고집할 때는 안 풀리고, 답답한 게 많았다.


▶장 교수=진화론에 대한 입장은 어떤가.


▶차 신부=지금 가진 생물학적•물리학적 데이터로는 진화론이 우세한 게 사실이다. 이걸 아니라고 하면 객관적인 접근법이 아니다. 진리를 향하는 태도가 아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론을 인정했다.


▶장 교수=생명 이해의 기본적인 틀은 진화론이다. 진화론을 외면하면 생명에 대한 이해를 차단하게 된다. 그건 매우 불행한 일이다. 생명을 잘못 알면 모든 게 틀어진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깊이 있는 생명 이해가 어려워진다. 시간적인 차원, 역사적인 차원의 생명 이해가 중요하다.



◆빅뱅과 천지창조-공존이 가능한가

- 성경에는 천지창조에 7일이 걸렸다고 기록돼 있다. 마지막 날은 하느님(하나님)도 일을 마치고 쉬셨다고 했다. 반면 과학자들은 빅뱅으로 인해 이 우주가 생겼다고 한다.


▶차 신부=빅뱅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 우주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이 없다고 한다. 그게 아니다. 하느님은 빅뱅 이전부터 계신 분이다. 또 천지창조에 24시간씩, 실제 7일이 걸렸다고 믿는 기독교인도 있다. 성경 해석 방법이 미숙한 거다. 그건 은유적 표현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화론 속에도 창조의 손길이 있다고 본다.


▶장 교수=과학자들은 정말 이 우주에 엄청나고 놀라운 질서가 있음을 느낀다. 그건 알아나갈수록 더 높아지고, 더 심오해진다. 그래서 궁극적 결과에 대해 미리 단정짓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계속 찾아갈 뿐이다. 성경에 ‘내 형상을 함부로 만들지 말라’는 게 이 뜻이 아닌가 싶다. 우주는 계속 변화하고, 무언가를 향해 나가고 있다.


▶차 신부=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그걸 철학적•신학적 용어로 ‘초월성’이라고 한다. 점점 더 새로운 것이 열린다는 거다. 그래서 과거의 것을 자기 스스로 파괴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하나님)의 형상-사람처럼 생겼나.


▶장 교수=많은 기독교인이 하느님은 사람처럼 생겼다고 본다. 창세기의 성경 구절 때문이다. 어찌 보나.


▶차 신부=성경에서 그 구절을 히브리어로 찾아본 적이 있다. ‘형상’이란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셀렘(Selem, 영어로는 Image)’이다. ‘셀렘’은 ‘본질•속성’이 닮았을 때 사용된다. 반면 겉모양만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긴 ‘형상’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데무트(Demut, 영어로는 likeness 또는 resemblance)’다. 결국 ‘하느님의 본질(속성)을 본 따 아담을 빚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의인화하고 인격화하며 ‘하느님은 이런 존재’라고 못 박는 건 곤란하다. 그건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이고, 편협한 생각 속에 가두는 일이다.



◆신의 존재? - 성경인가, 자연인가


▶장 교수=초기 과학자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성직자도 꽤 있었다.그 시대에는 하느님이 쓰신 두 권의 책이 있었다. 하나는 ‘성경(Book of Scripture)’이고 또 하나는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이다. ‘스크립처’와 ‘네이처’ 서로 운율도 맞다. 성경과 자연, 그 속에서 과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했다. 자연 속에 하느님이 새겨 놓은 말씀을 읽으려 했다.


▶차 신부=과학은 자연법, 종교는 영원법을 다룬다. 그런데 둘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톨릭)는 영원법 안에 자연법이 있다고 본다. 창조론 안에 진화론이 있다고 본다.


▶장 교수=다윈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느끼는 공감대가 있다. 다윈도 처음에는 생명이 그렇게 거대한 자연의 질서로 연결됐다는 걸 몰랐을 거다. 그걸 알았을 때 대단히 놀랐을 거다. 성경에 쓰인 문자대로의 신앙과는 다를 수도 있다. 다윈은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간 내면적인 신앙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차 신부=1916년과 96년, 두 차례에 걸쳐 ‘과학자들의 신앙’을 조사한 자료가 있다. 결과가 흥미롭더라. 첫 조사에서 과학자의 40%가 유신론적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여덟 번 바뀌었다. 과학도 놀랄 만큼 발전했다. 과연 96년에 실시한 조사에선 과학자의 몇 %가 유신론적 입장을 보였을까. 답은 40%로 똑같다. 결국 궁극의 초월적 영역에 대한 선택은 주관적인 것이다.


▶장 교수=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도 ‘신(神)’이란 단어를 많이 썼다. 많은 경우 이것은 자연의 질서를 말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자연의 신비를 보라고 했다. 그걸 보면서 깊은 종교적 감흥을 느끼지 못하면 이상한 거라고 했다. 그건 특정 종교를 말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신앙적 체험을 이야기한 거다. 사람들은 흔히 기적이나 이적(異蹟)을 통해 신을 찾으려 한다. 아인슈타인은 달리 말했다. 자연의 질서를 함부로 벗어나는 게 신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자연의 오묘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이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생명과 신, 나와 우주의 관계


▶차 신부=이스라엘은 중동(中東)이다.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다. 그래서 성경은 동양적 사고에 더 가깝다. 그리스와 로마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동양 특유의 통합적 사고다. 그래서 종교도 ‘부분’과 ‘전체’를 함께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장 교수=공감한다. 개인적으로 내겐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큰 숙제였고 화두였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모든 게 놀랍고 신비하다. 그 중에서도 ‘생명’이 특히 그렇다. 생명을 볼 때도 ‘부분’과 ‘전체’를 함께 봐야 한다. 생명은 낱낱으로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내가 지금 혀를 움직여 말하고 있다. 무슨 에너지로 움직이나. 태양 에너지로 움직이는 거다. 이렇게 촘촘한 인과(因果)의 실타래로 엮인 것, 그게 생명이다.


▶차 신부=그건 물리학자로서 이해하는 생명의 내재적인 메커니즘이다. 좀 더 듣고 싶다.


▶장 교수=‘낱생명’인 내가 진정한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태양과 지구로 구성된 생명의 전체 틀, 곧 ‘온생명’ 안에서 그 한 부분으로 엮어져 있어야 한다. 마치 나뭇잎이 나무 전체를 떠나 나무 노릇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온생명이면서, 동시에 낱생명이라는 이중의 주체성을 갖고 있다.



◆인간과 자연 - 정복인가, 돌봄인가


▶장 교수=『종의 기원』이 나온 지 150년 지났지만 생명에 대한 이해는 훨씬 더 깊이 가야 한다. 진화론이 다소 협소하게 해석된 점이 있다. 적자생존까지는 좋은데 ‘약육강식이 자연의 질서’라는 식으로 나가기도 했다. 이는 아주 일면적인 해석이다. 진화의 밑바닥에는 경쟁과 지배가 아닌 거대한 협동의 체계가 있다. 생태계에선 수천 만의 생물 종들이 서로 협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차 신부=성경 창세기 1장28절에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라는 구절이 있다. 그게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라는 뜻일까. ‘다스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찾아봤더니 ‘라다(radah)’였다. ‘라다’는 목동이 양을 돌볼 때 먹이고 다스리는 의미다. 그처럼 자연을 돌보라는 뜻이다.



◆진화와 창조, 그 궁극의 지향점

- 성경에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란 구절이 있다. 알파는 시작, 오메가는 끝으로 풀이된다. 종교와 과학, 창조와 진화는 어떨까. 그 끝에 과연 궁극적인 종점이 있을까.


▶차 신부=일종의 메타포(은유)다. 이 현실계에서 이해하자면 ‘나는 창조자다, 나는 섭리자다’라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차원을 넘어선 세계에선 알파도, 오메가도 필요가 없을 거다.


▶장 교수=그 문제를 다룬 이가 고생물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인 테이야르 드 샤르뎅이다. 그는 과학을 바탕으로 신학의 그림을 그렸다. 물질의 단계, 생명의 단계, 인간의 단계를 거쳐 신의 궁극적 섭리에 이르는 ‘오메가 포인트’를 제시했다. 그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정지된 게 아니다. 생명이 처음 시작된 35억~40억 년 전에는 나를 구성하는 모든 분자가 지구상을 떠돌아다니는 먼지 덩어리에 불과했다. 지금은 어떤가. 그 먼지 덩어리가 변하고, 변해서 내가 됐다.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존재, 우주에 대해 묻는 존재가 출현한 거다. 앞으로는 더 놀라운 일이 생길 거다. 과학자는 다만 여기에 대해 열려 있을 뿐이다.


▶차 신부=‘오메가 포인트’에 대해 철학자들은 진•선•미가 하나가 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신앙적 측면에서 보면 요한묵시록 21장4절(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에 나오는 ‘눈물도 없으리라’는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장 교수=모든 것의 근원이고, 모든 걸 포괄하는 어떤 것. 과학은 그 최종 원리를 증명할 수는 없다. 최종 원리는 항상 가정으로 남는다. 우리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겸손함’과 ‘열려 있음’이 중요하다. 그래서 과학은 초월과 종교에 대해서도 문을 열어놓고 있다. 차 신부의 말대로 종교가 과학을 바라보며 문을 열어두고 있듯이 말이다.


http://jplus.joins.com/Article/Article.aspx?listid=13552670

http://jplus.joins.com/Article/Article.aspx?listid=13552673


(2014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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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지구와 하늘과 이 세상의 구성요소, 천체의 움직임과 궤도 그리고 크기와 상대적 위치, 일식과 월식의 예측, 일년과 계절의 순환, 동물과 식물 광물의 종류 등에 대해서는 기독교 비신자들도 많이 알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이성과 경험에 의한 명확한 것이다.


그렇기에, 비신자에게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의미를 앞세우며 그러한 주제에 관해 사리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이다. 이는 기독교 신자의 엄청난 무식함을 드러내어 비신자들에게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창피한 상황은 막아야 한다.


그 부끄러움은 단지 무지한 개인이 조롱받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믿음의 울타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신성한 성경 저자들 역시 그렇게 무식하다고 생각하게 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힘들게 일한 것도 소용없이, 우리의 성경 저자들이 배움이 없는 이로 여겨져 그들에게 비판받고 배척당하게 될 것이다.


만약 비신자들이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이 실수를 하고 우리의 성경에 대한 그와같은 멍청한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경우, 비신자들에게 기독교인들의 경전이 자신들이 경험과 이성으로 습득한 것들에 대해 오류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줄 터인데 어떻게 죽은 자의 부활, 영생의 희망, 하늘의 왕국을 믿도록 할 수 있겠는가?


경솔하고 서툰 성경 해설자들이 유해한 오류에 빠져 우리의 신성한 성경의 권위 밖의 이들에게 비판을 받는 것은 그들보다 현명한 형제들에게 전에 없는 곤란과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럴 경우, 그들은 멍청하고 명백히 틀린 자신들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 그 증거로써 성경을 내세우고 심지어 그들이 기억하는 많은 문장들을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한다는 생각으로 인용하지만,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7)"


-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A.D.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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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번역:


"Usually, even a non-Christian knows something about the earth, the heavens, and the other elements of this world, about the motion and orbit of the stars and even their size and relative positions, about the predictable eclipses of the sun and moon, the cycles of the years and the seasons, about the kinds of animals, shrubs, stones, and so forth, and this knowledge he holds to as being certain from reason and experience.


Now, it is a disgraceful and dangerous thing for an infidel to hear a Christian, presumably giving the meaning of Holy Scripture, talking nonsense on these topics; and we should take all means to prevent such an embarrassing situation, in which people show up vast ignorance in a Christian and laugh it to scorn.


The shame is not so much that an ignorant individual is derided, but that people outside the household of faith think our sacred writers held such opinions, and, to the great loss of those for whose salvation we toil, the writers of our Scripture are criticized and rejected as unlearned men.


If they find a Christian mistaken in a field which they themselves know well and hear him maintaining his foolish opinions about our books, how are they going to believe those books in matters concerning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he hope of eternal life, and the kingdom of heaven, when they think their pages are full of falsehoods and on facts which they themselves have learnt from experience and the light of reason?


Reckless and incompetent expounders of Holy Scripture bring untold trouble and sorrow on their wiser brethren when they are caught in one of their mischievous false opinions and are taken to task by those who are not bound by the authority of our sacred books.


For then, to defend their utterly foolish and obviously untrue statements, they will try to call upon Holy Scripture for proof and even recite from memory many passages which they think support their position, although they understand neither what they say nor the things about which they make assertion."


- Saint Augustine of Hippo,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A.D.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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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원문:


"Plerumque enim accidit ut aliquid de terra, de coelo, de caeteris mundi huius elementis, de motu et conversione vel etiam magnitudine et intervallis siderum, de certis defectibus solis ac lunae, de circuitibus annorum et temporum, de naturis animalium, fruticum, lapidum, atque huiusmodi caeteris, etiam non christianus ita noverit, ut certissima ratione vel experientia teneat.


Turpe est autem nimis et perniciosum ac maxime cavendum, ut christianum de his rebus quasi secundum christianas Litteras loquentem, ita delirare audiat, ut, quemadmodum dicitur, toto coelo errare conspiciens, risum tenere vix possit. Et non tam molestum est, quod errans homo deridetur, sed quod auctores nostri ab eis qui foris sunt, talia sensisse creduntur, et cum magno eorum exitio de quorum salute satagimus, tamquam indocti reprehenduntur atque respuuntur.


Cum enim quemquam de numero Christianorum in ea re quam optime norunt, errare comprehenderint, et vanam sententiam suam de nostris Libris asserere; quo pacto illis Libris credituri sunt, de resurrectione mortuorum, et de spe vitae aeternae, regnoque coelorum, quando de his rebus quas iam experiri, vel indubitatis numeris percipere potuerunt, fallaciter putaverint esse conscriptos?


Quid enim molestiae tristitiaeque ingerant prudentibus fratribus temerarii praesumptores, satis dici non potest, cum si quando de prava et falsa opinatione sua reprehendi, et convinci coeperint ab eis qui nostrorum.


Librorum auctoritate non tenentur, ad defendendum id quod levissima temeritate et apertissima falsitate dixerunt, eosdem Libros sanctos, unde id probent, proferre conantur, vel etiam memoriter, quae ad testimonium valere arbitrantur, multa inde verba pronuntiant, non intellegentes neque quae loquuntur, neque de quibus affirmant."


-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De Genesi ad Litteram" (A.D.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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