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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삼위일체를 믿는가?

A: 그건 예수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다. 소위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요즘으로 치면 ‘갓예수’ 또는 ‘예수갑’ 아니면 ‘킹왕짱 예수’ 정도 되는 뜻일거다. 굳이 종교적 의미를 붙인다면, 당시 로마 황제가 불리기를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 불리었다.


Q: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기적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가?

A: 복음서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로 들어 보자. 예수를 보기 위해 꽤 많은 군중이 모이긴 모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그 지역의 인구 수로 보아 장정만 5천명, 부녀자와 연소자 모두 합쳐 대략 1-2만명의 인구가 일시에 집결해서 며칠을 따라다녔는데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에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은 그 군중 숫자의 ‘역사적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다만, 그보다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즉, 일용할 양식을 내려준 신에 대한 감사, 한 소년이 보여준 남들을 위해 내 것을 전부 내어줌, 그리고 그렇게 받은 것을 자기들끼리만 먹는 것이 아닌 모두와 함께 공유함. 이것을 통해 다른 오천여 명의 군중들이 모두 뒤따라 자신들의 것을 내어 나누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기적’이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모두를 ‘회심’시켜 인생관 및 그에 따른 행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Q: 예수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는가?

A: 그 ‘구원’이라는 것은, 어떠한 추상적 의미로서의 ‘죄악’ 또는 특정 조상이 저질렀다는 유전적 연좌제로서의 ‘죄’에 대한 ‘대속’이라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죄’라는 개념 그 자체의 무의미함을 깨우쳐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어떠한 종교적 ‘율법’의 기준에 의한 ‘죄’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예수의 행적 중 역사적으로 있었음직한 사건들은, 알고 보면 몇 개 없다. 1세기경 유대 지역을 돌며 가르침을 전하였고,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또는 소요사태, 또는 폭동)에 관여했으며, 이로 인해 로마 제국에 의해 사형을 당하였고, 그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고서 재림을 선포하였다는 것 정도 뿐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고, 어떠한 주제 전달을 위해 각색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건들의 ‘문자적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그러한 '기적 이야기'가 어떠한 주제 의식을 갖고서 어떠한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권의 경험의 종류나 신경 조직은 거의 다를 바 없으나 그들 구성원이 동일한 사건을 묘사하고 총괄하는 데 서로 다른 개념을 사용한다 (...) 여러 다른 문화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 다른 무리의 인간들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과 그들 자신의 본질을 개념화하기 때문이다."


- F.S.C.노드롭, 《사람, 자연 그리고 신》



"나는 과연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다양한 역사적 존재들로부터 구성된 허구적인 모델로 간주합니다. 그들 중 한명은 실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무엇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야기는 성서 이외의 기록에서 전해지는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인공적인 구조물이기 때문입니다."


- 로버트 프라이스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우리가 생각하기에 '신화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 신화가 사실이 아닌 것을 넣었다기보다 신화는 그들의 사유방식이에요. 이 세상의 것을 하나님의 것, 저 세상의 세계가 관여해서 일어난 일이다라고 표현하는게 고대인들의 사유방식이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한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그게 어떻게 동정녀 탄생이 가능하냐, 또 부활도 현대인들이 믿기에 어려운 측면이었지만 고대인들에게는 신과 인간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것이 그들의 사유방식이거든요. 그 다음에 부활은 곧 고대인들에게는 인간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이, 유대인으로서 십자가에 처형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점이 (믿기) 어려운 것이지, 부활은 종종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의 아들은 일반적으로 부활한다고 믿었고..."


- 김덕기 대전신학교 신약학 교수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해설) 유대 사회를 개혁하고 지상에 신의 왕국을 세우자 외쳤던 예수의 이야기를 이교도들에게까지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신화나 우화적 요소를 넣어 복음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예수가 존재했다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있습니다. 1세기 말에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 말고도 2세기 초의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동의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에서 사회운동을 벌인 사람이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처형당했지만 그 처형은 효력이 없었고 그 운동은 모든 곳으로 번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동정녀가 잉태를 한 것이죠. 사람들이 2천년 전에 그것을 말했을 때 과연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몽이 되지 않은 그 세상에서는 이교도들이나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나 인간을 위해 아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두 남녀 간의 통상적인 방식으로 수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었다고 한 겁니다. 이건 실수도, 거짓말도 아니며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 아이가, 이교도들이나 유대인들에게서 태어난 그 어떤 아이들보다도 훨씬 특별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 혹은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세기에 예수가 존재하기 전 지중해 연안 세상에는 신, 신의 아들, 신이 보낸 신, 주님, 구세주, 계시자, 세상의 구원자로 불리던 인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였지요. 예수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명칭을 로마 황제로부터 따와서 유대인 농부(예수)에게 붙인 겁니다.


이게 바로 1세기의 언어입니다. 우리에게는 특수한 기독교인들의 언어일지도 모르지만, 모든 동전에 '황제는 신의 아들이다'라고 쓰여 있을 정도였습니다.


성경을 믿으세요. 신성한 문학으로 절대적으로 진지하게 말입니다. (다만) 비유로 의도하고 쓴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진 마세요. 우화적으로 쓴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리고 그게 역사적인 사실인지 우화인지를 놓고 문자 그대로 사실인지 혹은 비유적인 것인지를 놓고 논쟁하지 마세요. 그것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게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도전할 과제, 즉 신의 세상을 차지한 폭력배들로부터 이 세상을 되찾으라는 것. 세상을 위협하는 폭력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해내라는 것. 바로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신을 위해 이 세상을 되찾으라는 것. 왜냐하면 이 세상은 신에게 속한 것이니까요."


- 존 도미닉 크로산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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